31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며 살아온 김도경 선생님.
오랫동안 이어온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은 어머니의 간병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 일을 내려놓았고,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선생님의 건강마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몸이 아프니 자연스럽게 외출도 어려워졌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 집에 찾아오는 것도 좋아했던 선생님에게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드는 시간은 더욱 힘겹게 다가왔습니다. 이대로 사람들과 멀어지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고립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오랫동안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왔던 자신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몸도 아프고…. 자꾸 나락으로 가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너무 한심해 보였어요.”
그렇게 자신의 삶이 한없이 작아졌다고 느끼던 어느 날, 명절을 맞아 복지관 아이들이 선생님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인사를 하고 돌아간 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라면 내가 충분히 공부를 가르쳐줄 수 있지 않을까?’
몸이 아파 외출은 어려웠지만, 오랜 시간 아이들을 가르쳐 온 경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여전히 31년 동안 쌓아온 영어 실력과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생각을 계기로 선생님은 먼저 복지관에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이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 하고 싶다. 생각하시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선생님의 재능이 필요한 이웃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Q. 그렇게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이야기가 궁금해요.
복지관을 통해 한 이웃을 알게 됐어요. 네 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분이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선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됐고요.
만난 지 2주 정도 됐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게 뭘까?’
마침 아이들이 많은 집이니 영어를 가르쳐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집 아이들 중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누군가를 돕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저도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아요.
Q. 오랜만에 다시 학생을 가르치는 건 어떠셨어요?
현장을 떠난 지 6~7년 정도 됐지만, 그래도 57세까지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으니까요. 오래 해온 일이라 다시 할 수 있었어요.
건우도 1년 정도 가르쳤는데 기억에 많이 남아요. 영어를 잘하길래 수학도 같이 봐줬어요. 초등학교 과정까지는 수학도 가르쳐줄 수 있었거든요.
참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어요. 더 오래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달라져 계속 만나지 못하게 된 게 지금도 아쉬워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고등학생이었던 제자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처음에는 내신을 집중적으로 봐줬는데 중간고사보다 기말고사 성적이 훨씬 좋아졌어요. 1학년 때 내신 등급이 많이 떨어진 채로 절 만났거든요. 2학년이 되더니 어느 날 그러는 거예요.
“선생님, 저 2등급 됐어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다음 학기에 1등급까지 된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 마지막 시험에서 1등급을 받고, 고3 내내 1등급을 유지했어요.
제가 제일 고마웠던 건 제가 이야기한 것을 정말 성실하게 해 왔다는 거예요. 아이가 잘 따라와 주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다 놓고 같이 먹으면서 공부하고, 겨울에는 귤을 까먹으면서 공부했어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혼자 무슨 귤을 이렇게 많이 먹어요?”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혼자 먹은 게 아니라 항상 아이들이랑 같이 먹었던 거죠.
이 아이도 처음에는 남에게 거리를 두는 아이였는데 점점 가까워졌어요. 나중에는 반말도 하고, 제가 웃기면 웃어주기도 하고요. 그렇게 점점 친해졌어요.
Q. 그 학생이 대학에 진학했을 때도 기억에 많이 남으셨겠어요.
숙명여대에 갔어요. 저도 숙대를 나왔거든요. 제 후배가 됐다며 얼마나 좋았했는지 몰라요.
그 친구가 저한테 “가르쳐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1등급을 받았을 때도 정말 놀랐어요.
‘얘도 머리가 좋은 아이구나.’
너무 뿌듯했죠.
Q. 오랫동안 돈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셨잖아요. 재능기부로 가르치는 건 무엇이 달랐나요?
예전에는 목동에서 한 달에 80만 원을 받고 과외를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영어를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돈을 벌면서 가르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고 성취감도 큰 것 같아요.
저도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내가 돈 벌려고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학부모를 상대하는 게 힘들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재능기부로 아이들을 만날 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특히 제가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라고 생각할 만큼 많이 가라앉아 있던 시기에 이 아이들을 만났기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도우려고 시작했는데, 오히려 제가 더 많이 얻었어요.
Q.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하나 꼽는다면요?
하나만 고르기는 어려워요.
학생이 1등급을 받았을 때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고, 숙대에 들어갔을 때도 너무 기뻤어요.
그리고 제가 만났던 이웃도 기억에 남아요. 늘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저한테 도움을 받으면서 “이렇게 받아본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정말 선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분도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Q. 지금도 누군가를 가르치고 계신가요?
네. 지금은 교회에서 알게 된 20대 대학생을 가르치고 있어요.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영어를 공부하고 있고, 혹시 나중에 유학을 가게 된다면 토플 공부도 함께 해볼 생각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동안에는 계속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 아이가 한 명 있어요.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인데 이제 곧 중학교에 들어가거든요. 중학교에 가기 전에 중1 과정을 조금이라도 미리 가르쳐주면 학교생활에 도움이 많이 되는 걸 아니까..
그런데 제가 장애가 있는 아이를 가르쳐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잘 모르고 하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혹시라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그래서 아직 조심스럽지만 자꾸 마음이 가요.
‘내가 저 아이에게도 해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선생님처럼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웃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한번 시작해보면 좋겠어요.
꼭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제가 가진 걸 나누는 일이 이렇게 행복할 줄은요.
“이게 더 행복하다니까요. 해보면 다 알아요. 저도 몰랐어요.”
31년 동안 쌓아온 영어 실력이 다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이 되고,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도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김도경 선생님.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민 손이 때로는 나의 삶을 다시 일으켜주는 손이 되기도 합니다.
처음 도경선생님은 복지관을 통해 만난 이웃과 아이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만남을 통해 선생님 역시 다시 자신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또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복지관이 누군가를 연결해주기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주변을 바라보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한때는 몸이 아파 외출조차 어려워지면서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 이제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스스로 발견하고,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게 더 행복하다니까요. 해보면 다 알아요. 저도 해보기 전까진 몰랐어요."
선생님이 발견한 이 행복이 마을 안에서 또 누구에게로 이어질지,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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